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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 유교 정치의 틀을 세우며 나라 안을 정비하던 무렵, 북쪽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993년, 거란의 대군이 고려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조정이 항복과 할지론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 순간, 홀로 담판을 자청한 신하가 있었습니다. 바로 서희입니다. 이번 편에서는 993년 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가 말로 전쟁을 끝내고 강동 6주를 얻어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소손녕의 침공과 봉산 전투
993년, 거란은 동경유수 소손녕을 앞세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거란군은 청천강 이북의 봉산군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고,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너희가 국경을 침탈하니 이를 정벌한다"는 문서를 보내며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스스로 80만 대군이라 칭했지만, 오늘날에는 실제로는 6만 명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정의 혼란, 할지론과 항전론
봉산에서의 패배 소식에 고려 조정은 크게 술렁였습니다. 성종이 직접 서경까지 나아가 군사를 독려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대신들 사이에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화친을 청하자는 할지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방안이 '땅을 내주자'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80만 대군이라는 말에 다들 겁을 먹었지만, 사실은 허풍이었어요. 숫자에 놀라 땅부터 내주려 했던 조정의 모습이 조금 안타깝기도 해요."
할지론(割地論) — 국경 지역의 땅 일부를 적에게 넘겨주고 화친을 맺자는 주장입니다.
📌 핵심 정리
· 993년 소손녕, 대군을 이끌고 고려 침공
· 봉산 전투에서 고려군 패배
· 조정 내 할지론(땅 할양) 대두
서희, 담판을 자청하다
서희의 결단
할지론이 힘을 얻던 그때, 서희는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싸워보지도 않고 땅을 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주장하며, 거란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서희는 스스로 거란 진영에 홀로 들어가 소손녕과 직접 담판을 짓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소손녕과의 첫 만남
거란 진영에 도착한 서희에게 소손녕은 신하로서 절을 올리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서희는 대등한 나라의 신하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그럴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소손녕은 한발 물러나 대등한 예로 서희를 맞이했습니다. 첫 만남부터 서희는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던 셈입니다.
소손녕(蕭遜寧) — 거란의 동경유수로, 993년 고려 침공을 이끈 장수입니다.
📌 핵심 정리
· 서희, 할지론에 반대하며 담판을 자청
· 홀로 거란 진영으로 이동
· 대등한 예를 요구해 관철시킴
국경 담판, 말로 싸우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다"
소손녕은 거란이야말로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나라이니 고려가 차지한 국경 지역을 내놓으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서희는 국호 자체가 고려인 것부터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증거이며, 오히려 거란의 동경(요양)이야말로 원래 고려의 영토라고 반박했습니다. 명분의 싸움에서 서희가 확실히 우위를 점한 순간이었습니다.
여진 문제와 거란의 진짜 의도
서희는 이어서 고려와 거란 사이의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건 그 사이를 가로막은 여진 때문이라고 짚었습니다. 사실 거란이 진짜 원한 것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국교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서희는 이 본심을 정확히 꿰뚫고,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을 고려가 확보하는 조건으로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소손녕이 진짜 원하는 게 땅이 아니라 '외교 관계'라는 걸 서희가 정확히 알아챈 거예요. 상대의 진짜 속내를 읽어낸 것이 이 담판의 핵심이었죠."
동경(東京) —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 일대로, 옛 고구려의 영토였던 지역입니다.
📌 핵심 정리
· 서희,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근거로 반박
· 거란의 진짜 목적이 여진 문제·대송 관계 단절임을 파악
· 여진 축출·국교 수립을 조건으로 협상 제시
강동 6주, 담판이 남긴 결실
강동 6주 획득
담판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거란은 별다른 성과 없이 군대를 물렸습니다. 오히려 소손녕은 서희에게 낙타와 말, 양, 비단을 선물로 건네기까지 했습니다. 이듬해 고려는 약속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용주·통주·철주·곽주·귀주에 성을 쌓아 강동 6주를 확보했습니다. 이로써 고려의 북쪽 국경은 압록강까지 넓어졌습니다.
서희 담판의 의미
서희의 담판은 단순히 전쟁을 피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꿔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외교적 승리로 평가받습니다. 다만 이때 확보한 강동 6주는 훗날 거란의 2차·3차 침입에서 다시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합니다.
강동 6주 — 흥화진·용주·통주·철주·곽주·귀주의 여섯 지역으로,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가 확보한 압록강 이남 영토입니다.
📌 핵심 정리
· 거란, 담판 후 별다른 성과 없이 철군
· 이듬해 여진 축출, 강동 6주에 성 축조
· 고려의 북쪽 국경이 압록강까지 확장
993년 거란의 침공 앞에서 조정이 땅을 내주자는 쪽으로 기울던 그 순간, 서희는 홀로 담판을 자청해 전쟁을 멈추고 오히려 강동 6주라는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말로 이뤄낸 이 외교적 승리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국경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다만 이 땅을 둘러싼 거란과의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어지는 거란의 침입 과정을 다뤄보겠습니다.
📌 거란 1차 침입 타임라인
993년 — 소손녕, 대군을 이끌고 고려 침공
993년 — 봉산 전투, 고려군 패배
993년 — 조정 내 할지론 대두, 서희 담판 자청
993년 — 서희·소손녕 국경 담판, 거란 철군
994년 — 여진 축출, 강동 6주 축성·확보
📘 시리즈 목록
▶ #031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서희는 어떻게 강동 6주를 얻었을까 — 현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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