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1차 침입은 고려와 몽골 사이의 갈등이 본격적인 전쟁으로 번진 사건입니다. 저고여 피살과 외교적 대립, 귀주성의 항전을 연결해 침입의 배경과 고려의 대응을 살펴봅니다.

최충헌이 다진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적으로 이어지던 시기, 북쪽 초원에서는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유라시아를 뒤흔드는 대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세력은 곧 고려의 운명에도 깊숙이 관여하게 됩니다. 이번 편에서는 몽골과의 첫 충돌이 시작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몽골,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칭기즈칸의 급부상
13세기 초, 칭기즈칸은 몽골 초원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파죽지세로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순식간에 중앙아시아와 화북 일대까지 세력을 뻗친 몽골은 동아시아 전체의 판도를 뒤흔드는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거란 유민 토벌을 계기로 한 첫 접촉
1218년 말 고려는 거란 세력을 추격해 온 몽골군과 본격적으로 접촉했습니다. 고려·몽골·동진의 연합 작전으로 1219년 초 강동성의 거란 세력을 굴복시켰고, 이 과정에서 고려와 몽골은 형제맹약을 맺었습니다. 전투의 시작과 마무리가 두 해에 걸쳐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습니다.
강동성 전투 — 1218~1219년 고려·몽골·동진이 거란 세력에 맞선 전투로, 고려와 몽골의 본격적인 관계가 형성된 계기였습니다.
📌 핵심 정리
· 칭기즈칸, 13세기 초 몽골 통일·급격한 팽창
· 1219년 강동성 전투에서 고려-몽골 연합
· 이를 계기로 양국 첫 외교 관계 성립
1225년, 저고여 피살 사건
과도한 공물 요구
외교 관계를 맺은 이후 몽골은 고려에 지나치게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며 부담을 안겼습니다. 이는 고려 조정의 불만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몽골 사신의 죽음
1225년, 고려에서 돌아가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 부근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진범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단정하며 국교를 단절했습니다. 제가 이 사건을 살펴보면서 느낀 점은, 진상이 불분명한 사건 하나가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씁쓸하다는 것입니다.
"저고여를 죽인 게 정말 고려였는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아요. 하지만 몽골은 이 사건을 침공의 구실로 확실히 활용했답니다."
저고여(著古與) —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골의 사신으로, 1225년 귀국길에 피살되었습니다.
📌 핵심 정리
· 몽골, 과중한 공물 요구로 고려와 갈등
· 1225년 저고여 피살 사건 발생
· 몽골, 고려의 소행으로 단정·국교 단절
1231년, 살리타이의 침공
몽골군, 압록강을 건너다
저고여 피살을 명분 삼은 몽골은 1231년, 장수 살리타이를 앞세워 마침내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는 이후 30년 가까이 이어지는 고려-몽골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빠르게 무너진 서북면 성들
몽골군의 진격은 매우 빨랐고, 서북면의 여러 성들이 잇달아 함락되었습니다. 세계를 정복하던 몽골군의 위력 앞에서 고려의 국경 방어선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살리타이(撒禮塔) — 1231년 몽골의 1차 고려 침공을 이끈 장수입니다.
📌 핵심 정리
· 1231년 살리타이, 몽골군 이끌고 고려 침공
· 서북면 여러 성 잇달아 함락
· 이후 약 30년에 걸친 여몽전쟁의 시작
귀주성의 항전
박서, 귀주성을 지켜내다
서북 지역의 방어선이 크게 흔들리는 가운데, 귀주성을 지키던 박서와 여러 장수·군민은 몽골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다만 고려 조정이 몽골과 화의를 맺은 뒤에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1232년 초 성문을 열었습니다. 전투에서 성을 지켜낸 사실과 이후 조정의 교섭에 따른 항복은 구분해야 합니다.
고려, 새로운 항전의 방식을 고민하다
귀주성의 항전은 정면 승부로는 몽골을 완전히 막아내기 어렵다는 현실과, 동시에 굳게 지키면 버텨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이후 최씨 정권이 강화도 천도라는 새로운 항전 전략을 택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귀주성(龜州城) —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박서가 끝까지 지켜낸 성으로, 몽골군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 핵심 정리
· 박서, 귀주성에서 몽골군의 공격을 방어
· 몽골군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함
· 이후 고려의 항전 전략 수립에 영향
1219년 강동성에서의 협력으로 시작된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1225년 저고여 피살 사건을 거치며 완전히 뒤틀리고 말았습니다. 1231년 시작된 몽골의 침공 앞에 대부분의 성이 무너졌지만, 박서가 지켜낸 귀주성은 고려에 여전히 저항할 힘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이후 강화도 천도와 삼별초 항쟁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여몽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최우의 강화도 천도 결정을 다뤄보겠습니다.
📌 몽골 침입 시작 타임라인
1218~1219년 — 강동성 전투, 고려-몽골 접촉과 형제맹약
1225년 —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국교 단절
1231년 — 살리타이, 몽골군 이끌고 1차 침입
1231년 — 박서, 귀주성 항전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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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침공의 명분과 전쟁의 배경
저고여 피살 사건은 몽골이 고려를 압박하고 침공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사신의 죽음만으로 전쟁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거란 토벌 뒤 몽골이 요구한 공물과 복속 관계를 고려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둘러싼 갈등이 함께 쌓이고 있었습니다.
귀주성 역시 ‘전투에서 함락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끝까지 화의를 거부했다’는 말을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박서의 방어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개경의 위협 등 전체 전황을 고려해 교섭했습니다. 지역 전투의 승리와 국가 차원의 전쟁 종결 조건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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