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042 처인성 전투와 살리타이의 죽음 — 화살 한 발이 바꾼 전쟁의 흐름

한-스푼 2026. 8. 22. 16:54

처인성 전투는 몽골의 2차 침입 때 김윤후와 주민들이 맞서 싸운 전투입니다. 몽골군 지휘관 살리타이의 죽음과 이후 전쟁의 흐름을 살펴보며 지역 항전의 의미를 알아봅니다.

처인성 전투와 김윤후의 활약을 표현한 대표 썸네일

고려의 강화도 천도는 몽골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살리타이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고, 이번에는 개경을 넘어 더 깊숙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름조차 낯선 작은 토성 처인성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번 편에서는 몽골의 2차 침입과 처인성 전투를 살펴보겠습니다.

몽골의 2차 침입

천도를 꾸짖은 살리타이

1232년 8월, 살리타이는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고 몽골이 세운 다루가치를 살해한 것을 문제 삼으며 다시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국왕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했지만 고려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서경의 반적과 손을 잡다

홍복원은 1231년 몽골에 투항한 뒤 고려 침입에 협력했습니다. 다만 그가 필현보와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은 1233년으로, 1232년의 처인성 전투와 구분해야 합니다. 고려 출신 인물의 몽골 협력과 서경 반란은 서로 이어지지만 같은 시점의 사건은 아닙니다.

📖 용어 정리
홍복원(洪福源) — 몽골에 투항해 길잡이 역할을 한 고려 출신 반역자입니다.

📌 핵심 정리
· 1232년 8월 살리타이, 2차 침입 감행
· 다루가치 살해와 천도를 침공 명분으로 삼음
· 홍복원은 몽골 침입에 협력, 서경 반란은 1233년

남하하는 살리타이

개경을 지나 한양산성까지

몽골군은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지금의 북한산성)을 함락시키며 거침없이 남하했습니다. 강화도의 조정은 바다 건너에서 이 소식을 초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주성에서 막히다

광주(지금의 남한산성)에서는 고려군이 몽골의 공격을 잘 막아내며 선전했습니다. 공략에 실패한 몽골군은 방향을 돌려 남쪽으로 계속 진격했고, 그 끝에 처인부곡의 작은 성, 처인성에 이르게 됩니다.

📖 용어 정리
처인부곡(處仁部曲) — 지금의 경기 용인 일대에 있던 특수 행정구역으로, 처인성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 핵심 정리
· 몽골군, 개경·한양산성 함락하며 남하
· 광주성에서는 고려군이 방어 성공
· 몽골군, 방향을 돌려 처인성으로 진격

처인성의 승려 김윤후

피난민들의 작은 토성

처인성은 정규 군대가 아니라, 전란을 피해 모여든 처인부곡 주민들이 지키던 작은 흙 성이었습니다. 백현원의 승려 김윤후도 이곳으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주민들을 이끈 승장

1232년 12월, 몽골군이 처인성을 공격했습니다. 김윤후와 이곳에 모인 부곡민·승려들이 힘을 합쳐 저항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다만 남아 있는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무기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성 밖에 저격수를 배치했는지 같은 구체적인 전술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작은 토성에서 주민들이 항전을 이어갔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 스푼이 한마디
"정규군도 아니고, 차별받던 부곡민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고 나섰다는 게 정말 놀라워요. 이런 게 진짜 민초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 용어 정리
김윤후(金允侯) — 처인성 전투를 이끈 승려로, 주민들과 함께 몽골군에 맞서 승리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 핵심 정리
· 처인성, 부곡민들이 자체적으로 방어한 토성
· 김윤후, 승려 신분으로 주민들을 지휘
· 구체적인 전술과 병력 구성은 기록이 제한적

화살 한 발이 바꾼 전쟁

살리타이의 죽음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고려사』에는 김윤후가 그를 쏘아 죽였다는 기록과, 김윤후 자신은 활과 화살이 없었다며 공을 사양했다는 기록이 함께 나옵니다. 김윤후의 지휘와 주민들의 항전은 중요하지만, 그가 직접 쏜 화살이었다고 단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몽골군의 철수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부장 철가의 인솔로 곧 북쪽으로 철수했습니다. 작은 토성 하나에서 벌어진 전투가 대규모 침공군 전체를 물러나게 만든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조정은 김윤후에게 파격적으로 상장군의 벼슬을 내리려 했으나, 그는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며 사양했다고 전해집니다.

📖 용어 정리
처인성 전투 — 1232년 12월 처인성에서 살리타이가 전사하면서 몽골군을 철수시킨 전투입니다.

📌 핵심 정리
· 1232년 음력 12월 처인성에서 살리타이 전사
·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 전의 상실·철수
· 고려, 장기 항전의 시간을 벌게 됨

정규군도 없이 부곡민들의 힘으로 지켜낸 처인성은, 몽골 제국의 총사령관 살리타이의 목숨을 앗아가며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시작된 팔만대장경 조판 사업을 다뤄보겠습니다.

📌 처인성 전투 타임라인

1232년 8월 — 살리타이, 몽골 2차 침입 감행

1232년 — 몽골군 남하, 한양산성 함락

1232년 — 광주성, 몽골군 방어 성공

1232년 음력 12월 — 처인성 전투, 살리타이 사살·몽골군 철수

처인성 전투 과정을 레시피 형식으로 요약한 인포그래픽 이미지 — 그림의 석축 성문은 실제 처인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처인성은 작은 토성이었습니다. 김윤후가 직접 화살을 쏘는 장면은 사살 기록을 바탕으로 한 삽화이며, 『고려사』에는 그가 활과 화살이 없었다며 포상을 사양했다는 기록도 함께 전합니다. 구체적인 사격 장면이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 시리즈 목록

▶ #039 최충헌과 무신정권의 안정

▶ #040 몽골의 침입이 시작되다

▶ #041 최우의 강화도 천도

▶ #042 처인성 전투와 살리타이의 죽음 — 현재 글

🥄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공감과 구독 부탁드립니다.

참고자료 · 전투의 성과와 확인하기 어려운 장면

처인성에서 살리타이가 전사하고 몽골군이 철수한 것은 이 전투의 핵심입니다. 반면 화살을 쏜 사람과 세부 전술은 사료 해석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김윤후의 직접 사살로 설명하는 자료도 있고, 그의 포상 사양 기록을 근거로 주민들을 이끈 역할에 주목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승리를 한 사람의 활 솜씨만으로 설명하기보다 성을 함께 지킨 주민들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댓글 보기 · 남기기

읽고 떠오른 생각이나 궁금한 점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