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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그의 아들 무왕과 손자 문왕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몸집을 키웁니다. 당과 정면으로 맞붙는 전쟁까지 벌였던 무왕, 그리고 나라의 틀을 안정적으로 다진 문왕. 이번 편에서는 두 왕이 어떻게 발해를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시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무왕, 발해를 이어받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719년, 고왕 대조영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대무예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발해의 제2대 왕, 무왕입니다. 무왕은 즉위 후 독자적인 연호 '인안(仁安)'을 사용했습니다. 연호를 따로 세웠다는 것은 발해가 당의 눈치를 보는 소국이 아니라, 스스로를 독립된 천하의 중심으로 여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흑수말갈 사건과 대문예의 망명
무왕 즉위 후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이 당과 직접 손을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발해 입장에서는 배후를 위협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흑수말갈 원정을 명령했지만, 대문예는 당과의 정면 충돌을 우려해 이 명령에 반대했습니다. 결국 무왕이 지휘관을 교체하려 하자, 처벌을 두려워한 대문예는 당으로 망명해버렸습니다. 형제 사이의 갈등이 발해와 당의 외교 관계를 더욱 얼어붙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연호를 따로 쓴다는 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선다'는 선언이었어요. 발해는 처음부터 기세가 남달랐답니다."
연호(年號) — 왕이 즉위하면서 독자적으로 제정하는 연대 표기 방식으로, 독립적 지위를 상징합니다.
📌 핵심 정리
· 719년 무왕(대무예) 즉위, 연호 '인안' 사용
· 흑수말갈이 당과 결탁 시도
· 대문예의 반대와 당 망명으로 발해-당 관계 악화
장문휴, 등주를 기습하다
732년 등주 공격
732년 9월, 무왕은 장군 장문휴에게 수군을 맡겨 바다 건너 산둥반도의 등주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장문휴는 등주를 기습해 점령하고,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는 발해가 당의 본토를 먼저 공격한 사건으로, 발해-당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건국한 지 3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이 대제국 당의 해안 거점을 직접 타격했다는 점에서, 무왕 시기 발해의 군사력과 자신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와 당 연합군의 반격 시도
등주 공격에 놀란 당은 신라에 발해를 함께 공격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신라군이 실제로 북쪽으로 출병했지만, 혹독한 추위와 폭설로 인해 큰 성과 없이 철군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흥미롭게 본 지점은, 발해가 신라와 당이라는 두 세력의 협공 시도를 받고도 별다른 타격 없이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변방국이 아니라 실질적인 군사 강국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당의 코앞까지 배를 몰고 가서 등주를 쳤다니, 무왕은 정말 겁이 없었어요."
등주(登州) — 오늘날 중국 산둥반도에 위치했던 당의 주요 항구 도시로, 발해와 마주한 해상 요충지였습니다.
📌 핵심 정리
· 732년 장문휴가 당의 등주를 기습 공격, 자사 위준 사살
· 발해-당 전쟁의 시작점
· 733년 신라·당 연합군의 반격은 폭설로 실패
문왕,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다
중경에서 상경으로, 여러 차례의 천도
737년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대흠무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발해의 전성기 기틀을 놓은 문왕입니다. 문왕은 연호로 '대흥(大興)'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즉위 후 동모산에서 벗어나 742년 무렵 중경현덕부로 도읍을 옮겼고, 755년에는 다시 상경용천부로 천도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천도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주자감 설립과 유학 교육
문왕은 당의 국자감 제도를 본떠 발해에 '주자감(胄子監)'이라는 국립 교육기관을 설치했습니다. 주자감에서는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쳤으며, 이는 옛 고구려 지방의 경당에서 이어져 온 교육 전통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체계적인 인재 양성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문왕 시기는 발해가 군사력뿐 아니라 문물 제도까지 갖춘 국가로 성장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싸움만 잘하는 나라와 제도까지 갖춘 나라는 완전히 달라요. 문왕은 발해를 후자로 만들었답니다."
주자감(胄子監) — 발해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왕족·귀족 자제에게 유학을 가르쳤던 곳입니다.
📌 핵심 정리
· 737년 문왕(대흠무) 즉위, 연호 '대흥'
· 742년 중경, 755년 상경으로 천도
· 주자감 설립으로 유학 교육 체계 마련
문왕, 발해국왕으로 책봉되다
762년 발해국왕 책봉
대조영과 무왕 시기 발해는 당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칭호를 받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762년, 당 숙종은 조서를 내려 발해를 정식 '국(國)'으로 인정하고 문왕을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책봉했습니다. 군왕에서 국왕으로의 격상은 단순한 호칭 변화가 아니라, 당이 발해를 대등한 국제 질서의 한 축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의미였습니다.
신라도 개설과 대외 교류
문왕은 당뿐 아니라 신라와의 교류로도 눈을 돌렸습니다. 발해의 동경용원부에서 남경남해부를 거쳐 신라 국경에 이르는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설하고, 그 길을 따라 39개의 역을 설치했습니다. 전쟁으로 시작된 발해와 신라의 관계가 문왕 시기에는 제도화된 교류의 길로 이어진 셈입니다.
"군왕에서 국왕으로! 호칭 하나 바뀐 것 같지만, 사실은 발해의 국제적 위상이 통째로 달라진 거예요."
신라도(新羅道) — 발해 동경용원부에서 신라 국경까지 이어진 교통로로, 39개의 역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 핵심 정리
· 762년 당 숙종이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
·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격상
· 신라도 개설로 신라와의 교류 제도화
무왕의 강력한 군사력과 문왕의 안정적인 체제 정비를 발판 삼아, 발해는 이후 선왕 때에 이르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만큼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발해를 동북아시아 최고의 나라로 끌어올린 선왕의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 무왕·문왕 시대 타임라인
719년 — 무왕(대무예) 즉위, 연호 인안
722년경 — 흑수말갈 사건, 대문예의 당 망명
732년 — 장문휴의 등주 공격, 발해-당 전쟁 발발
733년 — 신라·당 연합군의 반격 시도, 폭설로 실패
737년 — 문왕(대흠무) 즉위, 연호 대흥
742년/755년 — 중경·상경으로 잇단 천도
762년 — 당 숙종,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

📘 시리즈 목록
▶ #017 고구려의 멸망 — 연개소문 사후 내분부터 평양성 함락까지
▶ #018 나당전쟁과 삼국통일의 완성 — 매소성·기벌포 전투까지
▶ #019 한눈에 마스터하는 삼국시대 — 건국부터 삼국통일까지 연대기 총정리
▶ #020 통일신라의 체제 정비 — 신문왕, 왕권 강화와 개혁을 이루다
▶ #021 대조영,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다 — 천문령 전투부터 발해군왕 책봉까지
▶ #022 무왕과 문왕, 발해를 대국으로 키우다 — 등주 공격부터 발해국왕 책봉까지 — 현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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