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으로 인재를 키우고 장용영으로 군사력을 마련한 정조는, 이제 자신의 개혁을 실험할 무대를 직접 만들기로 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며 시작된 신도시 화성의 건설이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화성 건설과 정조의 개혁 정책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다
현륭원 이장
1789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당시 수원부에 속한 화산(오늘날 경기도 화성시)으로 옮기고 이름을 현륭원이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원부의 관아와 주민 거주지도 팔달산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아버지를 기리는 사업은 새로운 도시를 조성하는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효를 넘어 개혁의 거점으로
화성 건설에는 효심뿐 아니라 군사·행정·경제적 목적도 담겨 있었습니다. 정조는 1793년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장용영 외영을 두어 군사적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상업을 장려하고 농업 기반을 정비한 점에서도 화성은 정조의 개혁 구상을 보여 주는 도시였습니다.
현륭원(顯隆園) — 1789년 정조가 수원 화산으로 옮긴 사도세자의 무덤입니다.
📌 핵심 정리
· 1789년 사도세자 묘를 수원으로 이장
· 화성, 효심과 개혁의 거점을 겸한 신도시
· 1793년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
1794년, 화성 축조와 거중기
1794~1796년, 계획과 기술이 만난 공사
화성 성곽 공사는 1794년에 시작되어 1796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10년가량을 예상했다는 설명이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등 여러 기구가 작업을 도왔고, 계획적인 공사 관리와 인력 운영도 공사 기간을 줄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거중기 하나만으로 공사가 빨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품삯을 준 공사와 책임제
화성 공사에서는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고 공사 책임을 분명히 하는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건축과 공사에 관한 내용은 『화성성역의궤』에 상세히 정리되었습니다. 품삯 지급 자체를 조선 최초의 제도나 곧바로 근대적 노동제도로 보기는 어렵지만, 기술뿐 아니라 인력과 비용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도 살펴볼 만합니다.
"거중기만 기억하기 아쉽죠? 품삯 지급과 꼼꼼한 공사 기록도 함께 살펴보면 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거중기(擧重機) — 정약용이 고안한, 도르래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기계입니다.
📌 핵심 정리
· 1794년 착공, 1796년 완공
· 정약용의 거중기 등 과학 기술 활용
· 품삯 지급, 공사 관리와 기록
신해통공과 상업 개혁
시전 상인의 독점권
당시 한양의 시전 상인들은 국가에 물품을 공급하는 등의 의무를 지는 대신, 자신들이 취급하는 상품을 난전 상인이 파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누렸습니다. 이 권한의 확대와 남용은 소상인의 활동을 억누르고 물가 문제를 낳았습니다.
1791년, 금난전권 폐지
화성 축조에 앞선 1791년, 정조는 채제공의 건의를 받아들여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했습니다. 이것이 신해통공입니다. 특권을 잃은 시전 상인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시전 밖 상인들이 장사할 수 있는 범위는 넓어졌습니다. 다만 육의전의 특권은 남았으므로 모든 상업 규제를 없앤 조치는 아니었습니다.
신해통공(辛亥通共) — 1791년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조치입니다.
📌 핵심 정리
· 금난전권, 시전 상인의 물산 독점 수단
· 1791년 채제공 건의로 신해통공 단행
· 시전 밖 상인의 활동 확대, 육의전 특권은 존속
정조의 꿈과 갑작스러운 죽음
화성에 머물고자 한 구상
정조에게는 1804년 왕세자가 세는나이 열다섯 살이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 머물겠다는 구상이 있었습니다. 다만 실제 양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화성 행궁은 현륭원 행차 때 왕이 머무는 공간이었고, 정조의 장래 거처 구상과도 연결됩니다. 1795년에는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습니다.
1800년, 정조의 죽음과 남겨진 유산
정조는 병세가 악화된 끝에 1800년 음력 6월 28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조실록』에는 치료 경과와 창경궁 영춘헌에서의 승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정치 상황은 달라졌지만, 신해통공처럼 이후에도 이어진 정책이 있어 모든 개혁이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수원 화성(華城) — 정조 때 새로운 수원 읍치를 둘러싸도록 쌓은 성곽입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 핵심 정리
· 1804년 양위와 화성 거처 구상은 실현되지 않음
· 1800년 음력 6월 28일 정조 사망
· 수원 화성,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화성에는 정조의 효심과 왕권 강화 구상, 군사·경제 정책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계획도 있었지만, 성곽과 공사 기록, 이어진 정책을 통해 당시의 변화 노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시기 새로운 학문의 흐름이었던 실학을 다뤄보겠습니다.
📌 화성 건설과 정조 개혁 타임라인
1789년 — 사도세자 묘 수원 이장(현륭원)
1791년 — 신해통공
1794~1796년 — 화성 축조
1800년 음력 6월 28일 — 정조 사망
📚 참고 자료
축성 과정·품삯 지급: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정조의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 화성」
도시 조성과 공사 기록: 우리역사넷 「화성」
양위 구상: 우리역사넷 「정조」
신해통공의 범위와 계승: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해통공」
정조의 마지막 날: 『정조실록』 정조 24년 6월 28일 기사
세계유산 등재: UNESCO 「Hwaseong Fortress」

※ 본문의 두 이미지는 역사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제작한 상상도·요약 카드입니다. 실제 인물의 모습이나 현장의 정확한 복원도는 아닙니다.
🥄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공감과 구독 부탁드립니다.
댓글 보기 · 남기기
읽고 떠오른 생각이나 궁금한 점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