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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 강화도에서 맞선 서양의 무력 침공

한-스푼 2026. 10. 20. 20:25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은 1866년 프랑스, 1871년 미국의 무력 침공을 차례로 맞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전개, 그리고 척화비에 담긴 쇄국의 의미를 정리합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표현한 대표 썸네일

안으로는 세도정치를 무너뜨리고 왕권을 세운 흥선대원군이었지만, 바깥에서는 서양 세력이 조선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처형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 원정, 미국의 사건 조사와 통상 요구, 군함의 진입과 조선군의 대응이 맞물리며 두 차례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살펴보겠습니다.

서양의 접근과 병인박해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19세기 중반 조선 연안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의 배, 이른바 이양선이 자주 나타났습니다. 청이 서양 열강에 시달리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조정의 경계심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대원군은 한때 천주교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지만,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가 커지면서 1866년 대규모 천주교 탄압, 곧 병인박해를 단행했습니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 여러 명과 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었고, 이는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하는 직접적인 명분이 되었습니다.

📖 용어 정리
이양선(異樣船) — 조선 후기 연안에 나타난, 모양이 다른 서양식 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 핵심 정리
· 19세기 중반 이양선의 출몰과 통상 요구 증가
· 1866년 병인박해, 프랑스 선교사와 신자 희생
· 프랑스의 침공 명분으로 작용

1866년, 병인양요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

1866년 가을(강화도 본격 공격은 양력 10월),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공격해 강화성을 점령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선교사 처형에 대한 보복과 책임 추궁을 내세웠지만, 대원군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정족산성의 승리와 의궤 약탈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했고, 프랑스군은 곧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철수하면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정족산성의 승리와 함께 문화유산 약탈의 피해도 기억해야 합니다.

🥄 스푼이 한마디
"외규장각 『의궤』는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그림과 글로 정성껏 기록한 책이에요. 약탈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나서야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이 참 안타까워요."
📖 용어 정리
병인양요(丙寅洋擾) — 1866년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 핵심 정리
· 1866년 가을 프랑스 로즈 함대, 강화부 점령
· 양헌수,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 격퇴
· 철수 과정에서 외규장각 『의궤』 등 약탈

1871년, 신미양요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비롯된 충돌

1866년 미국 국적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 조선 관민과 충돌했고, 배가 불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871년 미국은 사건 조사와 통상 교섭 등을 목적으로 로우 공사와 로저스 제독의 함대를 파견했습니다. 강화해협 측량을 강행하던 미군과 조선 수비대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졌고, 뒤이어 미군의 상륙 공격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광성보의 항전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를 공격했고, 어재연 장군과 병사들은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도 끝까지 맞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미군은 어재연의 장수기인 수자기를 빼앗아 갔고, 이 깃발은 훗날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군은 군사 거점을 점령했지만 통상 조약 체결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철수했습니다. 조선군의 전투상 손실과 조약 체결을 막은 결과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용어 정리
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입니다.

📌 핵심 정리
·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구실이 됨
· 1871년 미군, 초지진·덕진진·광성보 공격
· 어재연 장군 전사, 수자기 약탈, 미군 철수

척화비와 쇄국의 그림자

전국에 세운 척화비

신미양요 직후인 1871년 대원군은 서울 종로를 비롯한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취지의 글이 새겨졌습니다.

지켜낸 것과 놓친 것

외국군이 물러난 결과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양요는 조선군의 장비와 화력의 한계도 드러냈습니다. 외세의 무력 압박 속에서 주권을 지키려 한 대응과, 변화하는 국제 질서에 대비하는 방식의 한계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쇄국은 서양과의 통상·수교 거부를 뜻하며 모든 대외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 용어 정리
척화비(斥和碑) — 서양과의 화친을 배척한다는 뜻을 새겨 1871년 전국에 세운 비석입니다.

📌 핵심 정리
· 1871년 신미양요 직후 전국에 척화비 건립
· 쇄국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
· 주권 수호의 대응과 군사·외교적 대비의 한계를 함께 평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외세의 무력 침공에 맞선 항전이자, 조선이 새로운 국제 질서와 마주한 사건이었습니다. 전투의 결과, 문화유산 약탈의 피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효과와 한계를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대원군의 실각과 강화도 조약을 다뤄보겠습니다.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타임라인

1866년 — 병인박해,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년 가을(양력 10~11월 본격 전투) — 병인양요, 정족산성 전투·『의궤』 약탈

1871년 — 신미양요, 광성보 전투(어재연 전사)

1871년 — 전국에 척화비 건립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과정을 레시피 형식으로 요약한 인포그래픽 이미지

※ 삽화는 AI로 제작한 학습용 상상도입니다. 실제 인물의 모습이나 사건 현장을 재현한 사료가 아닙니다.

📘 시리즈 목록

▶ #097 삼정의 문란과 임술농민봉기

▶ #098 천주교 박해와 동학의 등장

▶ #099 흥선대원군의 개혁

▶ #100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 현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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